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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다반사

만냥금

 

 은 줄 알았던 화분에서 새싹이 움 돋아 벅찬 감격을 주었던 초 6학년의 봄을 나는 아직도 또렷이 기억한다. 유년기를 눈 닿는 모든 곳이 푸르렀던 시골에서 자랐기에 새싹이 돋아나는 것은 흔한 풍경이었던 고로 감흥이 없었다. 그래서 식물에 대한 애착이 없었는데, 5학년 때 교실 환경 꾸미기의 목적으로 모두 가져와야 했던 화분도 내가 스스로 가꿔야 한다는 책임의식이 없어서 내버려 두었었고, 결국 앙상한 모습으로 변했었다. 내 화분을 포함한 우리 교실의 거의 모든 화분은 폐기 대상이었다. 그 누구도 뭐라고 하진 않았지만, 그때 그게 나에겐 좀 충격이어서 달력에 점검해가며 물을 주기 시작했다. 사실 엄마한테 혼날 것 같은 기분도 있었다. 분명 엄만 꽃이 예쁘게 핀 모습으로 주셨는데 나는 그걸 앙상하게 만들었으니 말이다. 아무튼, 긴가민가한 마음으로 가끔 물을 주었고 그 물을 마시고 자란 화분은 이듬해 봄에 예쁜 새싹을 틔웠다. 그리고 6학년이 되어서도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같았던 나의 화초 관리는 계속되었었다. 따스한 햇살이 가득했던 봄엔 햇빛을 볼 수 있는 최적의 장소에 놓고 매일 관찰했었다. 어려울 건 없었다. 잠깐 보는 것만으로도 내겐 충분했으니까.

 

 그때 이후로 사계절이 특별하게 느껴졌었고, 화초 가꾸는 게 재미있었다. 그리고 가까이에 이 즐거움을 아시는 분들이 계셨다. 바로 외할머니와 엄마. 지금도 내 사랑하는 이 두 분은 화초를 잘 가꾸고 계신다. 그 모습들을 보며, 사소하고 하찮아 보이는 것들도 소중하게 대하는 마음을 온전히 받는다. 나도 그러길 바라면서.

 

 지금은 사무실의 화분도 관리해야 해서 재밌지가 않다. 취미가 일이 되는 순간이랄까. 그건 흔히 싫어지는 순간이라고도 한다. 나 역시 그렇다. 그래서 사무실 한쪽은 드라이 플라워로 대체했다. 화분을 관리하기 싫다는 이유로 대체한 건 아니지만 어쨌든 수고스러움이 덜어져서 다행이라 여긴다. 그리고 집에선 요즘도 화초를 가꾼다. 말이 거창해 보이는데 사실 처음 좋아하게 된 계기와 비슷한 상황이다. 한때 화분에 무심했었고, 자주 잊었었고 낮은 온도로 생명력이 없어 보였었다. 그래서 이사 오면서 갖가지 핑계로 정리할까 했던 화분을 버리지 않았고 애정을 갖고 살피는 중이다.

 

 만냥금. 빨간 열매가 탐스러운 식물이다. 이 만냥금 열매를 맺기 위해서 큰 노력을 했지만 이사 오면서 부딪힌 싹이 잘렸고 물이 없어 말랐고 뭐 알 수 없는 이유-특히 나의 무관심 속에 죽어가다가 내가 다시 의지를 갖고 물을 주었을 때 하나의 열매가 맺히게 되었다! 이 기쁨은 온전히 나만 누릴 수 있는 기쁨일 것이다. 무관심과 애정의 모든 주체는 나였으니까. 아무튼 물을 줘야 했던 어제는 특별히 쌀뜨물로 주었다. 부디 이번 겨울도 온전히 잘 견뎌서 내년에 또 예쁜 새싹을 틔워주길. 만냥금 열매가 주렁주렁 열렸으면 좋겠다.

 

29, Nov, 2017

Sse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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